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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오빠와 감독님

우리말 가운데 쓰임새가 가장 넓고 다양한 건 ‘거시기’일 것이다. 전라도 분인 내 아버지는 1분간 전화 통화를 할 때 평균 6차례 “거시기”를 구사하는데, 곁에서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싶을 지경이다. 기호는 맥락 위에서 상호 교집합이 형성될 때 비로소 기능한다. 교집합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기호는 은어의 성격을 띠게 된다. 백제군이 구사하는 ‘거시기’는 신라군에겐 요령부득이다(영화 <황산벌>).

‘거시기’ 다음은 ‘빨갱이’이지 싶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어르신들이 얼마 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집회를 했는데, 박근혜 의원에게 완전국민경선을 요구하는 이재오, 김문수, 정몽준 의원을 “빨갱이”라고 비난했다. 전향 우파인 이재오, 김문수 의원이야 과거를 문제 삼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정몽준 의원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는 건 언중의 이해 수준을 넘어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날 집회 소식은 몇 안 되는 인터넷 매체에만 보도됐다.)

그들은 집회 끝물에 “근혜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외쳤다고 한다. 여기서 ‘오빠’는 자신의 성적 자원을 과시하며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시하는 용례(박현빈의 ‘오빠 한 번 믿어봐’)가 아니다. 물론 가부장제 체제에서는 섹슈얼리티 또한 가부장적으로 작동하지만, 박근혜 의원은 그들에게 ‘박정희의 딸’로, 여성이 아닌 여동생이라는 제3의 성으로 현전한다. 그들끼리는 박정희 혈족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세력은 모두 빨갱이이고,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된다는 건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아니라 박정희이라는 가부장의 부활이다.

전인적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하기는 테러리스트 김현희도 마찬가지다. 1987년 대한항공(KAL) 858 폭파 사건의 공식 테러범인 그녀가 최근 <TV조선>에서, 자신이 진범임을 의심하는 자들(유족단체가 대표적이다)은 종북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도 하지 않았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2005년)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7년)의 소환에도 불응했던 그녀가 느닷없이 특정 매체에 등장해 피해자들에게까지 색깔론을 펼치는 장면 역시 시청자들에게는 요령부득이다.

그런데도 <TV조선>뿐 아니라 자매지 <조선일보>까지 연일 관련 보도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건 저널리즘도 무엇도 아니다. 색깔 정국을 좀더 끌고 가고 싶은 이들이 여성 테러리스트를 잔다르크 배역에 캐스팅해 ‘종북주의’로 점철된 대사를 읊게 하는 부조리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은어의 폭주 사태를 어찌 묘사할 수 있을지, ‘거시기하다’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형용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