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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에 들어 산 것들을 만나다

사람들이 물을 건넌다. 내성천 물은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을 지우는 물이다. 이강혁

사람들은 무릎 높이까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며칠에 걸친 총강우량은 80~100mm였다고, 사흘 전 기상청은 발표했다. 봄비였다. 남한강 이포보 제방 200m를 쓸어가고, 낙동강 취수장 가물막이를 무너뜨려 56만2천 명이 마실 물을 삼켜버린 비는 이곳에도 똑같이 내렸다. 키가 큰 사람도 키가 작은 사람도, 다만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무릎은 물의 물리적 깊이가 아니라 사람의 심리적 깊이 같아 보였다. 바로 옆에 수달이 누고 간 똥이 보였다. 큰물이 쓸고 간 뒤에 남긴 하루이틀 사이의 흔적일 터였다. 그 똥이 일러주는 건 이곳 수달의 넉넉한 개체 수와 부지런한 품성이었다. 발원지에서 45km 내려온 내성천 상류 물가 모래밭에서 도강은 시작됐다. 산에는 연록으로 봄단풍이 스며 싱그러웠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을 지나는 물은 바툰 두 산자락이 서로에게 양보한 틈 사이를 더듬어 크게 휘돌았다. 가난하지만 너그러운 이웃끼리 모래를 함께 품은 형세였다. 물은 그 모래 위를 흘렀다. 경사는 완만하여, 물은 중력에 이끌리지 않고 바람에 밀려 마실을 가는 듯싶었다. 여남은 명이 띄엄띄엄 줄지어 물 가운데로 흘러들었다. 봄의 강물은 순간 차가웠다. 물은 심리적 깊이를 넘어 허벅지를 적셨다. 물보다 빠른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켰고, 바닥의 모래는 발끝으로 모인 체중을 음전하게 빨아들였다. 그때마다 물은 바지의 흘수선을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가로지르지 않고 비껴서 건넜다. 건너되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거스르려는 욕망을 지우는 물이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강은 끝났다. 가장 먼저 건넌 이가 모래밭에 주저앉아 발바닥을 비벼 말라가는 모래를 떨 때, 마지막 건넌 이는 다리를 흔들어 허벅지에 달라붙은 젖은 바지를 털었다. 신발을 꿰어 신은 지율 스님은 “지금은 평소보다 물이 깊고 물살도 세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순하다”며 안도했다. 큰비가 오고 사흘 뒤였다. 구미의 식수난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서울 한강에는 흙탕물이 가득 흐르고 있을 때였다. 이맘때 봄 내성천은 웬만한 곳이면 발목께를 겨우 적시고, 물은 타고 가는 바닥 모래의 주름을 온전히 본뜨며 흐른다고 했다. 비가 온 뒤에도 금세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저수와 배수가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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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해 사행하다 예천 회룡포를 지날 때 가장 크게 심호흡한다. 회룡포 마을 초입으로 들어선 물길은 마을 둘레를 타원형으로 한 바퀴 거의 다 휘돈 다음 빠져나간다. 마을을 떠나는 물길은 들어서는 물길과 좁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스칠 듯 비꼈다가 다시 멀어져 낙동강 삼강나루로 합류한다. 삼강나루 쪽으로 돌아나가기 전의 내성천 물은 회룡포의 길고 고요한 날숨 같다. 숨을 다 내쉰 내성천은 비로소 싣고 온 이름 석 자를 내려놓는다. 물은 직선거리로는 그 반의 반도 안 되는 길을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따라 셀 수 없는 굽이를 그리며 흘러왔다. 물굽이는 내성천의 들숨과 날숨이다. 그것은 내성천의 가장 뚜렷한 생명 현상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어느덧 네 번째 걸음이다. 물길은 매번 달랐다. 물과 모래, 중력과 바람의 상호작용은 너비 100m 안팎, 총연장 100여km를 가득 메운 모래밭에 여러 갈래 물 그림을 그리고 지운다. 가을에 하나였던 물길은 겨울에 둘로 나뉘었다 봄에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봄에 하나가 된 물길은 지난가을의 물길과는 다른 궤적이다. 찾아온 계절의 물길은 지나간 계절의 물길을 기억하지 않는다. 물도 흐르고, 모래도 흐르고, 뒤따라 세월도 흐른다. 내성천이 그리는 그림은 계통이 없는 것도 같고 있는 것도 같은데, 계통이 없다면 군데군데 넉넉한 하중도 습지를 만들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자연의 계통일 것이다.

내성천은 지나간 계절보다는 훨씬 먼 기억을 보듬은 것처럼 보인다. 지질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이 낙동강 상류 지천의 전생은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바다가 융기해서 이룬 길고 협애한 산자락 사이로 물은 지나가는 것만 같다. 바다는 모래를 품은 채 골짜기와 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바위와 자갈로 뒤덮이고, 계곡과 폭포와 소로 이뤄진, 지리 검정교과서가 기술하는 여느 지천 상류의 소란한 풍경이 내성천에는 없다. 그리고, 내성천의 풍경은 지구상 다른 어디에도 없다. 그 풍경 속에서 사람은 그저 객이다. 수달, 노루, 고라니, 흰목물떼새, 물자라, 왕버들은 수줍게 주인 행세를 하지만, 그 들짐승과 날짐승, 물벌레, 물가 식물들도 사실 세입자이다. 부지런히 살고, 힘껏 대를 잇다, 마침내 떠난다. 내성천에 애초 재산권이란 없다. 

물을 따라 모래는 떠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데칼코마니 수채화 같은 흔적을 남긴다. 지율 스님

개중 가장 오래 머물러온 것이 모래다. 개별의 모래 알갱이가 아니라, 상태로서의 모래가 그렇다. 알갱이로서의 모래는 붙박이지 않는다. 아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 물은 반대다. 개별의 물은 쉼없이 떠나지만, 줄기와 흐름으로서의 물은 모래와 연배가 비슷한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물이 흐르는 건 당연하다지만, 다른 데서 보아온 물보다는 두어 박자 느리게 진양조장단으로 흐른다. 모래와 물은 길동무 같아 보이는데, 끝까지 동행하지는 않는다. 개별의 물은 떠나도, 개별의 모래는 떠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한다. 떠나는 것과 머무는 것에는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떠나는 것과 머무는 것 사이에 데칼코마니 수채화 같은 흔적이 남는다. 큰비가 오고 나면 흔적은 더 넓고 깊어진다. 내성천은 살아 있는 수채화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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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한 일행은 물가를 따라 다시 걸었다. 사진을 찍는 이는 사진으로 기록하고, 동영상을 찍는 이는 동영상으로 기록하며 걸었다. 나는 글로 기록하며 걸었다. 마음으로만 기록하는 이들이 가장 앞서 걸었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이들이 가장 뒤에서 걸었다. 나는 중간쯤에서 걸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느덧 종심은 200m 이상 길어졌다. 물길이 다시 휘도는 지점에서 맨 앞의 일행은 목측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보니 맨 뒤의 일행도 곧 나를 보기 어려울 듯싶었다. 기록할 것은 많았고, 물길은 거듭 휘돌았다. 내성천을 제 집처럼 오가며 사진을 찍는 ‘서풍’(작가명)씨가 “평은면에서 금강마을을 거쳐 무섬마을까지가 사행천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고 일러주었다. 귀농한 봉화 농민 문종호씨는 “이 구간 아홉 굽이를 중국 무위구곡을 본떠 운포구곡이라 부른다”고 말을 보탰다.

물길이 제방 쪽으로 바짝 다가와 붙으며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내성천이라 해도 비 온 뒤 물이 휘도는 곳은 수심이 제법 깊다고 했다. 운포구곡을 물길로 다 살필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행은 대열을 이룬 왕버들 사이로 여린 풀숲을 헤쳐 제방 위로 올랐다. 제방 너머로는 빗살무늬토기를 뉘어놓은 형상의 분지가 논과 밭과 과수원 따위를 옴팡하게 품고 있었다. 물의 길과 사람의 터전을 제방이 경계 짓고,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 기대어 있었다. 사람의 터전에도 봄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방 위는 사람과 수레 정도가 오갈 수 있는 흙길이었다. 일행은 길을 따라 빗살무늬토기의 좁다란 주둥이 쪽을 향해 걸었다. 비탈로 군데군데 노란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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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조장단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지리 검정교과서에서 기술하는 지천 상류의 소란한 풍경은 없다. 서풍

멀리, 내성천을 가로질러 철교가 얹혀 있다. 정기 열차가 서지 않는 평은역을 지척에 둔 이 다리는 청량리역과 경주역을 오가는 중앙선 철길의 한 토막이다. 물 위로 기차를 건네주는 근대 교통의 한 요소이지만, 다리는 애초 기하학적 구조물보다는 미학적 조형물로 풍경 안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걸어서 다리 앞까지 이르는 사이 화물열차가 한 번 지나갔다. 화물열차는 바퀴 쪽에서 덜거덕거리는 반복음을 내며 길게 빠져나갔다. 바퀴와 레일이 문질러낸 쇳소리는 이물스럽지 않았고, 느리고 단조로웠다. 내성천 유역에서는 자연뿐 아니라 모든 게 내성천의 모래와 물을 닮아 있었다. 내성천은 기차는 물론 사람까지도 자신의 영향권 안에 거느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다리가 사라질 거라고 했다. 발목께를 겨우 적시는 내성천의 흘수선은 사방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의 중턱까지 밀려 올라갈 거라고 했다. 다리 앞에서 지율 스님이 그렇게 말했고, 사진 찍는 서풍씨도 농사짓는 문종호씨도 거듭 확인해주었다. 평은철교 몇km 아래에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감할 수 있는 전언이 아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보다 이미지 조형력이 크게 떨어지는 말이었다.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봄 햇살에 보송보송 말라가는 흙길이었다. 길 왼쪽으로는 큰비 오고 사흘 만에 허벅지 깊이로 흐르는 내성천이었고, 오른쪽으로는 군데군데 모내기를 앞두고 논물이 찰랑거리는 들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수몰예정지구였다.

 

제방을 사이로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에게 기댄다. 서풍

내성천을 뒤로하고 철길을 따라 난 농로를 걷는다.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서니 한 마장쯤이 평은역이다. 멀리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은역 앞으로, 헤어졌던 내성천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물은 거기서도 사행하고 있다. 일행은 평은역을 눈앞에 두고 방향을 틀어 다리를 건넌다. 다리는 금강마을(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로 나 있다. 다리 초입의 석회가루는 이곳이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 마을임을 일러준다. 지난겨울 여기에도 구제역이 돈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던 고등학교 교사 정진영씨가 물새 한 마리를 가리킨다. 흰목물떼새라고 했다. 물속에 부리를 담갔던 새는 고개를 들더니 날개를 펴고 상류 쪽으로 날아간다. 멀어지던 새는 물굽이를 따라 외로 돌며 이내 눈에서 사라진다.

금강마을은 물을 따라 걷기 시작해 처음 만나는 마을이었다. 장씨 고택은 몇십 호가 사는 마을 한가운데서 내성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지어진 이 집은 경북 문화재 자료 233호로 지정되어, 아쉬운 대로 관의 관리를 받고 있는 듯했다. 마을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농사일을 나가서일 터였다. 모란꽃만 가득 피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뒤로 고샅길을 올랐다. 뒷동산 중턱쯤에 쓴 무덤 앞에는 이장 공고가 붙은 말뚝이 박혀 있었다. 금강마을도 수몰예정지구였다. 고택도 유택도 모두 물에 잠기면 더는 농사일로 마을을 비울 일도 없을 것이다. 금강마을은 축산과는 거리가 먼 듯, 소 한두 마리가 들어설 만한 우리가 몇 군데 보였을 뿐, 그마저 텅 비어 있었다. 수몰과 구제역은 모두 사람의 일이었다.

뒷동산 마루에 오르자 마을 반대편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영주댐 건설 현장이었다. 금강마을은, 뒤에 숨어 비밀공작을 펼칠 수 있도록 댐에 아지트를 내주고 있었으나, 정작 댐의 아가리에 갇힐 운명이었다. 이전 정부에서 건설 계획을 세웠다가 주민들이 반대하고 쓸모도 없는 것으로 평가돼 폐기됐던 사업이 이명박 정부 들어 4대강 사업과 함께 훨씬 큰 규모로 되살아났다. 애초 이름도 ‘송리원댐’이었으나, 영주시가 중앙정부에 청을 넣어 ‘영주댐’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곳 지방권력에게 댐 건설은 자부심과 긍지를 부르는 역사(役事)인지 모르겠으나, 마을 앞에 댐 반대 현수막을 내건 이들의 절박함은 지방권력의 자부심과 동행할 수 없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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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포구곡 끝자락의 무섬마을(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은 금강마을에서 차로 한달음이다. 그러나 물은 두 마을 사이에서만 크게 일곱 번 굽어 흐른다. 금강마을 앞을 지난 물이 무섬마을 앞에 당도하려면 시간 위를 얼마나 흘러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금강마을과 무섬마을은 하나의 물줄기를 두고 형성된 강마을이다. 물은 무섬마을이 금강마을보다 지척이다. 물은 마을 앞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지나간다. 마을 앞 모래밭에는 내성천 쪽으로 좁은 섶다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섶다리는 물 건너까지 이르지 않고 물 가운데서 멈춘다. 건너다니려는 다리가 아니라 나들이 온 이들을 위한 다리 같은데, 해마다 큰물이 지면 다리가 끊기는 것이라고 했다. 나들이 온 이들이 짝으로 혹은 떼로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봄 주말 오후, 내성천은 물비늘을 자잘하게 튕겼고, 사진 찍는 이들은 어금니까지 드러내고 웃었다. 우리 일행도 기념촬영을 했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 입향시조와 그의 손자사위인 신성 김씨가 양대 성바지를 이룬 집성촌이다. 무거운 기와를 얹은 집들과 가붓한 짚을 엮어 얹은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유서 깊은 마을은 새로 단장하고 ‘민속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우당(海愚堂)만이 1879년 중수한 이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상갓집 개’로 낭인 노릇을 할 때 들렀다 쓴 것이라고 문화관광해설사 김희옥씨가 설명했다. 김씨는 “무섬마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첫째가 논밭이요, 둘째가 사당이며, 셋째가 대문이었다. 논밭이 없는 건 큰물이 지면 이 마을까지 내성천의 유역이 되기 때문이고, 사당이 없는 것도 같은 사정이라고 했다. 대문이 없는 건 인심을 은근히 뽐내려는 뜻일 터였다.

무섬마을엔 없는 것이 또 있다. 가게가 없다. 커피를 하나 사려 해도 내성천을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 46호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안동 하회마을처럼 번잡해질 것을 걱정한다고 김씨가 전했다. 마을 한쪽에 서 있는 ‘마을헌장’에는 물질의 탐심에 물들지 않고 두 성바지가 평화롭게 살 것을 다짐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김씨가 말을 이어간다. “원래 해우당에서는 내성천을 볼 수 있었는데 제방을 쌓고 나서 조망이 막혔다. 제방을 걷어내고, 제방 위에 만든 주차장도 물 건너로 옮겼으면 싶다. 멀리 내다보면 그게 더 낫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의 품성으로 조성된 마을 같았다. 평균 연령 78살의 주민들도 한평생 내성천을 보며 살다 내성천의 일부가 된 듯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씨의 바람에서, 적어도 기술적 장애는 사라질 것이다. 영주댐이 완공되면 금강마을부터 위쪽으로는 물에 잠기겠지만, 댐 아래쪽은 건천으로 변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영주댐은 영주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구미, 멀게는 대구의 상수원 구실을 할 것이라는 추론은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낙동강 본류는 이미 파헤쳐지고 여러 개의 보가 들어서 먹을 물을 길을 곳이 마땅치 않다. 구미 단수 사태는 그 뚜렷한 징후다. 영주댐은 늘 최고 수위까지 물을 가두고, 방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건천에 제방은 쓸모없는 흙더미일 뿐이고, 누군가는 그 흙더미를 돈과 바꾸려고 탐낼 것이다. 그리 되면 김씨의 바람은 푸석한 현실로 실현된다. 내성천의 절반은 수몰하고 나머지 절반은 말라, 내성천은 전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댐은 2014년 완공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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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은 셀 수 없이 많은 물굽이를 그리며 100여km를 흐른다. 물이 돌아가는 지점 너머는 목측할 수 없다. 이강혁

일행은 지율 스님이 거처하는 우감마을(경북 예천군 개포면 우감리) 농가에서 밤을 났다. 이야기는 이슥하도록 이어졌다. 뚜렷한 서사를 이루지 않았지만, 잔잔하게 사행하듯 흘렀다. 말하는 이는 물과 같았고, 듣는 이들은 모래와 같았다. 대학교수가 말을 하면 현지 농민이 넘겨받았고, 회사원이 다시 풀어갔다. 골짜기와 들이 된 바다처럼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었다. 내셔널트러스트운동(자연신탁국민운동)을 펼쳐 10만 명이 모인다면 내성천의 물과 모래가 계속 흐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율 스님은 말했다. 그 이야기는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래톱으로 차츰 쌓여가는 듯이 보였다. 콘크리트처럼 굳건한 현실과 모래처럼 곡진한 희망 사이의 거리가 흔들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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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감마을에서 가까운 개포면 신음교 앞 내성천으로 갔다. 내성천에서 가장 너른 유역과 습지를 품은 그곳이 밤새 부산했던가 보다. 너구리 발자국과 왜가리 발자국이 총총했고, 말조개가 몸을 끌고 가며 남긴 줄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자국에 객들의 발자국이 보태졌다. 이제 지척의 회룡포만 들르면 내성천 답사도 끝나고, 자칫 내성천의 미래가 될지 모르는 낙동강 경천대와 상주보 일대로 한나절 강행군을 해야 한다. 지난해까지는 바지를 걷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 포클레인과 콘크리트의 유역을, 다만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회룡포에서는 차로 불과 1시간 거리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